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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의 정체

20세기 초의 러시아에는 총 65개의 교구에 130여명의 주교, 57,105명의 사제, 15,210명의 부제, 20,000명의 수도자, 60,000명의 수녀가 있었고 본당은 54,457개나 되었다. 그리고 40,150개의 교회학교와 57개의 신학교(4년제 과정), 그리고 4개의 신학 아카데미(4년제, 석사학위과정 및 박사학위 전과정)가 있어 성직자들을 양성하였으며, 신자 수는 1억명에 달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교회였다. 그러나 그 내부적인 상황은 침묵을 강요하는 짜르 권력의 관료주의적인 통제하에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정부는 교회가 그리스도교인의 진정한 여론을 대변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에 관한 모든 서적은 철저한 검열을 받았고, 심지어는 설교문 조차 기존질서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전에 국가관리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얻어야 했다. 게다가 200년 동안 교회회의는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으며, 대교구와 소교구 모두 이전부터 누려오던 자치 권한을 모두 박탈당했다. 니콜라이 1세의 치하에서는 경비병 부대의 장교였던 프로타소프 백작에게 종무원이 인계되었다. 알렉산더 2세의 치하에서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교회행정에 도입되었으나, 이 자유는 극단적인 반동의 옹호자였던 포베도노스쵸프(1827-1907)에 의해 억압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주교들을 이동시켜 신자들과 접촉할 기회를 박탈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자유를 회복시키려는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1905년 짜르는 칙령을 통해 모든 시민에게 종교적 자유를 부여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 후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국가의 통제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라는 요구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러시아 정부는 교회에 몇 가지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05년 포베도노스쵸프는 강제로 은퇴해야만 했다. 그리고 교회회의에 대비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2년 후에 철회되고 말았다. 짜르는 최후까지 교회의 자유를 억압하여 짜르가 몰락한 후인 1917년 8월에야 러시아 교회회의는 모스크바에서 소집될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정 말기에는 그레고리 라스푸친이라는 인물로 인해 한 충 더 어두웠다. 황후는 사제도 수도자도 아닌 평범한 농민인 그를 수천만 러시아 농민의 진정한 대변인으로 믿으면서 총애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건전한 생각을 가진 정교회 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를 탁월한 예언자로 여겼던 사람들을 타락시켰다.

 

러시아정교회의 영적 부흥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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