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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대주교의 생애
-기적을 일으키는 상하이와 샌프란시스코의 성자-

"여기 연약해 보이는 이 분은 오늘날과 같이 영적으로 약해지는 이 시대에 흔들림
없고 단호한 금욕생활의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다." - 안토니 수좌대주교

"당신이 만약 살아있는 성인을 보고자 한다면, 비톨에 가서 요한 신부님
을 만나기를 권합니다." - 니콜라스 주교.

[성삼위일체 수도원의 라우루스 수좌대주교의 허락과 축복으로 여기에
이 글을 올립니다. 원문제목: "성 요한, 상하이와 샌프란시스코의
기적의 성자의 생애", 해외러시아정교회, 성삼위일체 수도원,
미국, 뉴욕, 죠단빌 1997]



성 요한은 1896년 6월 4일 카르코프 지방 아다모프카의 작은 도시에서 귀족, 보리스 이바노비치와 글라휘라 미하일로브나 막시모비치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세례를 받을 때 그는 대천사 성
미카엘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았다. 그의 아버지의 조상은 시베리아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 중 한 분인 토볼스크의 수좌대주교 성 요한은 거룩한 생활을 한 금욕주의자였고, 선교사이며,
영성 작가이기도 하였다. 토볼스크의 성 요한은 18세기 전반에 살았었고 1916년에 시성되었다.
그의 시성은 순교자 황제 니콜라스 통치시대에 마지막 시성식이었다.

성 요한은 유순한 아이였다. 그의 누이는 성 요한은 부모가 기르기에 아주 쉬운 아이였다고 회상
한다. 어린시절부터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하였으나 그는 군대나 여타 공익업무에 근무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부모님에 의해 알게된 진리를 향한 열정으로 인도
될 것이라는 점만은 알고 있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한 사람들의 생애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폴타바 사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성 요한은 "사관학교는 러시아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장을 장식했다" 고 훗날 말하곤 했다. 그는 모범 학생이었으나 체육과 춤을 싫어했다. 그는 학교에서 촉망받는 학생이었음에도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느꼈다. 이 생각은 사관학교의 유명한 종교교사이자, 성 파이시 벨리치코프스키와 성 옵티나 수도자에 관한 책들을 쓴 세르게이 체트베리코프와 만나면서 구체화되었다. 또한, 성 요한은 근처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수사 대사제 발람과 만나서 영향을 받았다.

미하일 막시모비치(성 요한)가 사관학교를 졸업한 시기는 대주교 안토니(크라포비츠키)가 카르코프의 책임자로 부임한 때와 일치한다. 이 유명한 대주교이자 신학자는 러시아의 총대주교좌 복권을 위해 힘썼고, 그 후 키예프와 갈리의 수좌대주교로 봉직한 후 해외러시아정교회의 첫 번째 수좌대주교가 되었다. 수좌대주교 안토니는 전 생애에 걸쳐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과 진실한 사랑을 보여줌으로서 감명을 주었다. 젊은 미하일 막시모비치(성 요한)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안토니 대주교는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바로 카르코프에서 안토니 대주교가 성 요한의 영적인 스승이 되었다. 이 둘의 관계는 안토니 대주교의 전 생애에 걸쳐서 지속된다.

카르코프에서 미하일은 법학을 공부하여 1918년에 마치고 카르코프 법원에서 근무하였다. 이 때
우크라이나는 코삭 지도자 스코로파츠키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래의 성자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공부하지 않을 때는 그는 자신의 모든 여가시간을 대학교 도서관에서
영적인 저작들 특히 성인들의 삶에 대하여 읽었다. "세상적인 과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과학 중의
과학인 영적인 삶에 대하여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라고 성 요한은 자신의 주교 선출 시 이렇게
말하였다. 안토니 대주교가 있는 수도원을 방문하여 성 요한은 18세기 전반의 금욕주의자 레이레
티우스 레온티예비쉬 -깊은 존경을 받고 있으나 아직 시성되지는 않음- 의 묘지에서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젊은 성인의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목마름으로 가득했다.

바르나바 주교가 카르코프(후에 세르비아의 총대주교가 됨)에 방문하였을 때 성 요한은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젊은 세르비아의 주교는 터키 치하에서 고통받는 세르비아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었는데, 안토니 대주교는 그를 따뜻하게 대접하였다. 이 일은 혁명 전의 1917년으로, 세르비
아는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와 싸우고 있었고, 세르비아에는 적군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 영토가
없을 정도였다. 안토니 대주교의 설교로 많은 러시아인들은 세르비아를 도왔다. 이러한 예에서,
미하일(성 요한)은 교회와 정교회 신도들에게 있어서의 주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그 후, 바르나바 주교가 총대주교가 된 후, 그는 해외러시아정교회에 대해 아주 우호적이었고
도움을 많이 주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막시모비치 일가는 조국을 떠나 유고슬라비아로 갔는데, 여기서 미하일
은 그의 신학공부를 성 사바 대학교에서 시작하여 1925년에 마쳤다. 신학과정 마지막 해에 미하
일은 안토니 대주교에 의해 독서직 서품을 받고, 1926년에 안토니 대주교는 그를 밀코보 수도원
의 수사 서품을 주었다. 이때 그의 조상이자, 최근에 시성된 토볼스크의 성 요한을 따라 요한으로
명명되었다. 지극히 거룩한 테오토코스의 성전봉헌 축일 날, 젊은 수도사는 수사 사제가 되었다.
이 때 성 요한은 세르비아의 비톨의 신학자 성 사도 요한 신학원의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비톨에서 신학원생들과 함께 있는 성 요한
<비톨에서 신학원생들과 함께 있는 성 요한>

비톨에서 성 요한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영적인 투쟁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
다. 성 요한은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매일 성찬예배를 올리거나 성찬예배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신비를 경험하고, 저녁에 한 번만 식사를 하는 엄격한 금식생활을 하였다. 성 요한의
학생들은 성 요한이 결코 자기 위해 눕는 것을 보지 못했고, 성 요한이 졸고 있을 때는 극도로
피곤해 있을 때 한 쪽 구석의 이콘 앞에서 엎으려 있는 것을 보곤 했다. 니콜라스(벨리미로비치)
주교는 이 젊은 수사 사제 요한을 사랑했다. 한 번 신학원을 잠시 떠나면서, 그는 신학원 학생들
에게, "여러분, 요한 신부님 말씀을 잘 들으세요. 그는 사람의 모습을 한 하느님의 천사입니다."
라고 말했다. 신학원 학생들은 성 요한이 천사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의 인내와 겸손은 사막의 위대한 금욕주의자들의 인내와 겸손과 흡사했다. 그는 복음서의 사건
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상상하고 다시 체험하였다. 그는 언제나 해당 사건의
장과 절을 잘 알아서 인용하곤 했다. 그는 모든 학생의 성격과 학생들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잘 알아서, 그는 매순간 학생들이 이해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알 수 있었다. 성 요한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비상한 기억력이었다. 따라서, 학생에 대한
그의 평가는 어떤 기록이나 자료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성 요한과 신학생들 사이의 사랑은
서로를 하나로 묶었다. 신학생들에게 있어서 성 요한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본이었다. 그들은
성 요한의 어떤 결점도 보지 못했고, 약간 말을 더듬는 성 요한의 설교에서조차 어떤 잘못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즉시 해결되지 못할 인간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성 요한이
대답하지 못할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간결하고, 명확하고, 완전하고, 포괄적
이었다. 그 이유는 성 요한은 진정으로 박식하였기 때문이다. 성 요한의 교육, 그의 "지혜"는 가장
확고한 기초, 즉,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 위에 놓여있었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을 위해서
열렬히 기도하였다. 매일 밤 그는 숙소를 다니면서 모든 학생들이 잘 자고 있는 지, 베개를
똑바로 놓아주고, 이불을 덮어주며 확인하였다. 학생들이 자고있는 방을 떠나면서 그는 십자가
표시로 그들을 축복해주었다.

사순절 첫째 주간에 성 요한은 하나의 프로스포라(역주: 성찬예배 시 사용되는 작은 빵)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고통의 주간에도 그렇게 하였다. 성 대 토요일이 오자 그의 몸은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성스러운 부활의 날에 그는 되살아났다. 부활절 아침예배에서
그는 승리에 가득 차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쳤는데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날 밤에 부활한 듯 했다. 성 요한이 보여준 부활의 환희는 교회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었다. 성 요한과 부활절 예배를 함께 지낸 사람은 누구든지 이러한 경험을 하였다.

1934년에 해외러시아정교회 주교 시노드는 성 요한을 상하이의 주교로 승품시킬 것과 그를 중국
관구의 대리 주교로 임명할 것을 결정했다. 성 요한은 자신이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결정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주교 시노드는 예언자 모세도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답하였다.
주교 서품식은 1934년 5월 28일에 거행되었다. 성 요한은 안토니 수좌대주교가 서품한 마지막
주교였다.

상하이의 성 요한 대성당
<상하이의 성 요한 대성당>

젊은 주교는 1935년 11월 21일, 지극히 거룩하신 테오토코스의 성전봉헌 축일에 세르비아에서
상하이로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은, 혼신을 다해 책무를 완수하고 곧 상하이의 중요한 인물이 될
그들의 새로운 주교를 보기 위해서 부두에 모였다. 대성당의 건축 완료 건과 관구 문제로 인한
갈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 요한은 신속하게 갈등을 누그러뜨리고 자신의 관구에 있는
세르비아인, 그리스인, 그리고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형성하였다. 성 요한은 거대한
대성당을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리며 "죄인들의 피난처"로 축성하고 종탑이 있는 3층 건물을 완공
하였다. 그는 어린이들의 영적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직접 상업학교의 고학년에게
하느님의 법을 가르쳤고 상하이에 있는 모든 학교의 종교과목 시험에 참여하였다. 그는 감동을
주는 지도자로서, 교회, 병원, 정신병원, 고아원, 양로원, 공동 식당을 건설하였다. - 다시 말해서
상하이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의 모든 사회적 고충을 해결하였다. 성인은 그의 양떼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는 거의 모든 이민 관련 기관과 관련된 일에 직접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세상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첫날부터 성인은 전과 같이 매일 성찬예배를 드렸다. 한 번은 예배 중에 너무
오래 서있어서, 성인의 발이 심하게 부었다. 의사들은 괴저병을 염려하면서 즉시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성인은 거절했다. 러시아 의사들은 교회 운영위원회에 자신들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위험하다고 알렸다. 교회 운영위원회의 한 사람은 장황한 설득과 강압적인
방법으로 성 요한의 동의를 얻어 그를 입원시켰다. 그러나, 그날 밤, 성인은 병원을 빠져 나와서
평상시와 같이 오후 6시에 철야예배를 드렸다.

그는 모든 매일의 예배를 줄이지 않은 완전한 형태로 드렸다. 마침기도에서 그는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5개 또는 그 이상의 성인 명부를 읽었다. 성인은 지성소에서의 불필요한 대화를
허락하지 않았고, 지성소에서 기도하는 이들에게 행동지침을 만들어 주고, 다정하면서도
엄격하게 행동지침을 지키도록 하였다. 성찬예배 후, 성 요한은 지성소에서 두 세 시간 동안 홀로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성인은, "우리 자신을 기도에서 떼어내고 세상적인 일들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고 말씀하셨다. 밤에도 그는 잠을 자는 대신 깨어있었다.
그는 결코 정해놓고 방문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어떤 날씨에도 가장
예기치 못한 시간에 갑자기 나타났다. 매일 그는 성물을 가지고 병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종종
궂은 날씨의 늦은 시간에 상하이의 거리를 주교지팡이를 집고 바람에 옷을 휘날리며 걷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사람들이 그런 궂은 날씨에 어디를 가시느냐고 물으면, 성인은, "그리 멀리 않은 곳
입니다. 저는 몇 군데를 방문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래서 물었던 사람들이 성 요한을
모시고 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은 거의 2-3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간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육체적
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성 요한의 그러한 사랑의 실천은 빈곤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자돈스크
의 성 티콘 고아원 설립을 들 수 있다. 그는 몇 몇 여성들과 8명의 아이들로 시작하여 15년 사이에
상하이에서 수 백명의 아이들을 양육하게 되었다. 성 요한 자신이 병들고 굶주린 상하이의
어두운 거리의 아이들을 모았다. 한 번은 성인이 작은 소녀을 고아원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녀를
중국인으로부터 보드카 한 병에 샀다고 말했다.

상하이 관구의 신도들은 자신들의 주교에 대하여 깊은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1943년에 그들이 멜레티우스 수좌대주교에게 보낸 다음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평범한 신도들은 때때로 출판되기도 하는 매일의 설교 말씀에서 우리 주교님(성 요한)의
지식의 깊이와 박식함에 감탄하며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깊은 신앙으로 인도됩니다.
우리 신도들은 우리 주교님께서 여러 인종이 살고있는 도시인 이곳 상하이에 오신 후에 우리가
보고 느낀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교님께서 도착하신 이후로 교회의 분열이라는 슬픈 현상은 끝이 났고, 자돈스크의 성 티콘
고아원은 무에서 만들어져 현재는 200 여명의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자선가 성 휠라렛
빈민구제소도 발전되었습니다. 상하이의 모든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신부님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성사를 거행하며, 집 없는 이들에게도 장례식을 올려줍니다. 정신적인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정기적인 방문을 하십니다. 주교님(성 요한)께서는 젊은이들
의 엄격한 정교회 신앙 교육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러시아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
를 다니는 아이들도 이제는 "하느님의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주교님은 우리를 전통적인 러시아정교회의 신앙으로 이끄시고 보호하십니다.
여러 종파의 조직과 비정교인들도 정교회 신앙의 고수를 위해서 고투하시는 주교님의 모습을
이제는 잘 이해합니다. 우리의 주교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교회, 병원, 학교, 교도소, 시민 및
군 단체를 방문하셔서 신앙을 다시 불러일으키십니다. 그의 방문 이후, 그의 기도와 개인적 방문
을 받지 못한 연약한 신도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는 횃불같이 우리의 죄를 비추시며, 울려 퍼지는 종소리처럼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투쟁으로 부르십니다.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방문하시어 우리가
세상적 부패로부터 잠시라도 멀어져 우리의 눈을,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하늘로 향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과 같은 삶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말에나 행실에나 사랑
에나 믿음에나 순결에 있어서 신도들의 모범이 되시오" (디모테오 전서 4:12).

그의 양떼들은 그들의 목자에게 이렇게 높이 평가를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이
었다. 신도들은 성 요한을 보며, 양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모습을 느꼈다. 일본 점령
하에서 러시아인 이민위원회 소속의 두 명의 사장이 연속적으로 살해되자, 러시아인 이민 사회에
공포가 감돌았다. 성 요한은 이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러시아인 이민사회의 임시 대표자로
선언하였다.

1945년 멜레티우스 수좌대주교의 안식과 전쟁의 종결 후, 새로운 모스크바 총대주교 알렉세이 I세
휘하에 러시아 이민 성직자들을 종속시키고자 하는 압력이 거세졌다. 알렉세이 I세는 1927년에
"교회는 소비에트 정부에 협력할 것"을 공표한 세르게이 총대주교의 후임자였다. 극동에서 거의
모든 주교들이 새롭게 선출된 총대주교에게 종속되었다. 성 요한은 이를 거부하여 그의 위에
있는 주교인 빅토르 대주교에게 엄청난 압력과 협박을 받았다. 이 때 성인(성 요한)은 간단히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저는 해외러시아정교회 주교 시노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교
시노드가 이끄는 길을 걷겠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지연된 우편물이 성 요한에게 배달되었다. 그것은 주교 시노드에서 요한 주교를
대주교로 임명하는 내용이었다. 중국 정부와 시 당국은 대주교 요한을 중국 러시아정교회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하였다.

성 요한의 기적을 일으키는 힘과 통찰력은 상하이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한 번은 성 요한이
유대인 병원에 있는 정교회 신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한 병동을 지나서 성 요한은 나이든 유대인
여성이 죽어 가는 것을 가리고 있는 커튼 앞에서 멈추었다. 성인은 십자가를 커튼 위로 쳐들고
큰 소리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회쳤다. 바로 그때 죽어가던 여인이 의식을 회복
하고 물을 달라고 하였다. 성인은 간호원에게 다가가서, "환자에게 마실 것을 주세요" 라고 하였
다. 의료진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어가고 있었던 환자에게 일어난 변화에 너무도 놀랐다.
곧, 그 여인은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또, 하나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성 요한이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를 위해서 성체성혈성사를
영해주기를 요청 받고, 다른 신부님과 함께 병원을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20살 정도
의 젊은이가 하모니카를 불고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회복하여 막 퇴원하려고 하고 있었다.
성인은 그를 불러, "나는 당신에게 지금 즉시 성체성혈을 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젊은이는 즉각 성 요한 앞에 와서, 고백성사를 하고 성체성혈을 모셨다. 함께 동행한 신부는
놀라서 왜 주교님께서는 죽어 가는 환자에게 가지 않으시고 건강한 젊은이와 시간을 지체하는 지
물었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젊은이는 오늘밤 죽을 것이고, 지금 중환자실이 있는
이는 앞으로도 오래 살 것입니다." 그 후, 성인의 말씀대로 되었다. 하느님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성인을 통해서 유사한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1940년 후반,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중국의 러시아인들은 다시 망명하여야 했는데 대부분
이 필리핀 섬을 통해서 피하였다. 1949년에, 거의 5000명의 러시아 망명자는 투바바오 섬에 있는
국제망명조직의 주거시설에서 지냈다. 그들은 가장 원시적인 조건에서 천막 생활하였다.
고아원의 모든 아이들과 양로원에 있던 노인들, 병약자들 모두 함께 그곳으로 왔다. 이때 그들은
무서운 허리케인의 위협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그 섬이 계절마다 태풍이 태평양을 지나가는
길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이 27개월 동안 그 곳에 사는 동안, 단 한번 태풍이 섬을
위협했지만, 그것조차도 방향을 바꾸어 섬 옆으로 지나갔다. 매일 밤 성 요한은 전체 거주시설을
둘러보고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축복하였다. 그 후 사람들이 섬을 떠나 여러 나라로 간 후, 그
거주시설이 완전히 비워져 있을 때, 맹렬한 태풍이 땅에서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었던 거주시설
을 휩쓸어 땅과 평평하게 만들어 버렸다.

투바바오섬의 러시아인 주거시설에서의 성 요한
<투바바오섬의 러시아인 주거시설에서의 성 요한>

성인이 러시아인들의 망명을 탄원하기 위해서 시 당국의 대표에게 가야만 했다. 성 요한은 직접
워싱톤 D.C에 청원하여 거주시설에 있는 러시아인들이 미국으로 입국할 수 있도록 탄원하도록
부탁 받았다. 그는 워싱톤에 가서, 모든 인간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이민법을 개정하는데 성공
하여 그의 양떼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실현하였다.

1951년 성 요한은 서유럽 관구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처음에는 파리에서 후에는 브뤼셀에서
관구 일을 보았다. 그는 쉬지 않고 유럽 전역을 방문하여 성찬예배를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전과 같이 그리스어, 중국어, 영어로 집전하였다. 파리에서 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우리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사시는 분이다." 한 천주교의 신부님은 젊은이들에게
하는 강론에서: "여러분에게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이제는 더 이상 기적도 성인도 없다
고 말합니다만, 살아있는 성인이 파리의 거리를 맨발로 걷고 있는데, 아직도 이론적인 증명이
필요합니까?"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에서 성 요한은 서방교회에서는 공경하고 있으나 동방정교회에서는 잊혀진 고대의 성인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교회에 알렸다. 그의 추천으로 잊혀진 고대의 성인들이 공경되고 그들의
이름이 교회 달력에 기록되었다.

성 요한의 영성, 언어의 유창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모범적인 생활은 많은 프랑스인,
독일인과 유럽인을 정교회로 이끌었다. 그가 유럽에 있으면서 수행한 선교의 결과는 이토록
대단한 것이었다.

1962년 가을, 성요한은 맨 처음 자신의 관구에 도착한 날과 같은 날인 지극히 거룩하신
테오토코스의 성전봉헌 축일에 그의 마지막 관구에 도착하였다. 먼저 그는 나이 들어 연약한
티콘 대주교를 돕는 일을 하였고, 티콘 대주교의 안식(1963년 3월 17일) 후, 성 요한은 미국 서부
와 샌프란시스코의 대주교가 되었다. 다시 성인은, 중국에서처럼 내분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있던
성당을 찾아,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헌신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모든 슬퍼하는 자의 기쁨"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대성당을 안고 있는 성 요한 이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모든 슬퍼하는 자의 기쁨"
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대성당을
안고 있는 성 요한 이콘>

성 요한의 첫째 임무는 새로운 관구 성당인, "모든 슬퍼하는 자의 기쁨"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테오토코스 대성당 건축을 다시 시작하고 완공하는 것이었다. 이 성전 공사는 기금의 부족과
재정난 해결 문제를 놓고 생긴 교회 공동체의 내분으로 인하여 중지된 상태였다. 하느님은
자애롭게도 성인을 도우셔서, 불일치와 갈등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성인이 계속해서 기도를 하며
성전 건축을 감독하게 하시고, 모든 이들이 희생하며 일을 하도록 감명을 불어넣게 하셨다.

당시 성 요한은 미국의 법정에 서야할 정도로 많은 인내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때는 중상모략의 비통함과 박해로 가득했다. 성 요한은 신도들에게 교회의 법을 엄격히 따를 것
을 종용하자, 시기와 적개심에 가득 찬 비평,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분란과 마주쳤다. 당시 어떤
사람이 성 요한에게 교회에 분열을 일으킨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지 물었다. 성인은 간단히
답하였다: "악마입니다".

1964년, 미국에 있는 해외러시아정교회의 성당 중 가장 큰 성당이 다섯 개의 둥근 금색 지붕으로
장식되어 마침내 완성되었다.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배를 타면서도 볼 수 있는 위엄을 보이는
웅장한 십자가를 거양하기 위한 엄숙한 행렬(수 킬로미터)이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 행렬은 폭우로 인해 거의 취소가 될 뻔하였으나, 성인은 지체없이 성가를 부르며 흠뻑 젖은 도시의 길로 신도들을 이끌었다. 이 행렬은 성인의 삶에 대한 승리의 왕관이었다.

성 요한은 언제나 자신의 양떼 중 가장 작은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성 요한은 언제나 자신의 양떼 중
가장 작은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기적을 일으키는 지극히 거룩한 테오토코스의 기적을 일으키는 꾸르스카야 이콘과 함께 시애틀
로 가서, 성 요한은 그 곳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성찬예배를 올리고, 성전에서 세 시간 동안
남아있었다. 때는 1966년 6월 19일(구달력) 이었다. 그리고 나서 성당 근처에 사는 그의 영적
자녀들을 기적을 일으키는 이콘과 함께 방문한 후, 자신이 머무는 교회의 방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성 요한을 모시던 사람들은 누군가가 바닥에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계단을
달려 올라갔을 때, 성인은 바닥에 누워 이미 이 세상을 떠나 있었다. 그들은 성 요한을 기적을
일으키는 이콘 앞의 편안한 의자에 앉혔고 성인은 주님 안에서 평온하게 안식을 맞이하였다.
바로 그때, 그는 휴식과 수면의 유혹과 싸웠던 그토록 어려운 투쟁을 끝냈다. 그들은 성인을 방의
침대에 눕혀서 그를 40년의 고행 후에 쉬시면서 주무시게 하였다. 성인을 열렬히 사랑한 성삼위
일체 수도원과 시라큐스의 대주교 아베르키는, "이제 평안히 잠드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성인의
장례식의 설교에서도 마지막에 아베르키 대주교는, "오 우리의 사랑하는 블라디카(주교님), 이제
평안히 잠드십시오. 당신의 의로운 일들과 투쟁에서 벗어나 이제는 쉬십시오. 우리 모두 부활할
그날까지 평안히 쉬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성 요한의 경건한 장례식은 1966년 6월 24일(구달력),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슬퍼하는 자의 기쁨"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테오토코스 대성당에서 거행되
었다. 장례식은 성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자 하는 수많은 신도로 인해 저녁 6시에 시작하여
다음 날 새벽 1시에 끝났다. 수좌대주교 휠라렛이, 레온티, 아베르키 대주교, 사바, 넥타리 주교와
수많은 성직자들과 함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장례식의 분위기는 가슴 찌르는 듯한 통렬함과 신성한 기도로 가득했다. 이 경건함을 장례식
참석자는 누구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성 요한을 존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깊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도들을 둘러싸는 특별한 기쁨이 가득했다.

성 요한의 시신은 대성당의 열려진 관에 5일 간 있었으나, 찌는 듯한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부패해지지 않았다. 그의 손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시신에 아무런 것도
가하지 않았을 때였다.

이크나티(브리안챠니토프) 주교님의 글, "죽음에 대한 생각"의 한 구절이 불현 듯 떠오른다:
"여러분은 영혼이 떠난 상태의 의인의 몸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몸에서는 어떠한 썩는
냄새도 없습니다. 그 시신 옆에 있다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의인의 장례식에서 슬픔은
보이지 않는 기쁨과 함께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언제나 기억되는 이그나티 주교님의 말씀대로,
성 요한이 하느님의 자애와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 요한은 안식 후에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성 요한에게 오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많은 기적과 병고침을 행하였다. 생애에서 어려운 시점을 만난 사람들이 아무런 세상적
인 도움이 없을 때 성 요한이 하느님께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구하였다. 많은 글들과
기도제목들이 성인의 주교 묘비 아래에 놓여졌고, 많은 이들이 그들이 바라던 대로 기도의 응답
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대성당의 썩지 않는 성 요한의 유해가 안치된 곳
<샌프란시스코 대성당: 썩지 않는 성 요한의 유해가 안치됨>

1993년 가을, 해외러시아정교회 주교 시노드는 서부 미국과 샌프란스스코의 대주교 안토니와
두 명의 대주교를 성 요한의 유해를 조사하도록 파송하였다. 1993년 9월 28일(구달력), 묘지 앞에
서의 파니히다(추도식) 후에 안토니 대주교는 짧은 설교를 하였다. 그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이
성스러운 일이 받아들여지도록 설명했고 모든 이의 용서를 구한 후, 묘지를 열게될 사람들을
축복하였다. 묘지의 돌 뚜껑을 열고 난 후, 참석자들은 성인의 금속관을 꺼냈는데, 관은 완전히
녹슬어 있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관을 열었다. 성인
의 얼굴은 덮여져 있었고, 모든 이들은 성인의 썩지 않은 하얀 손을 보았다. 기도를 하면서
안토니 대주교가 성 요한의 얼굴을 가린 천을 들어내었더니, 하느님의 영광을 받은 성인의 썩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이 순간 초자연적인 영적인 평화와 지극히 거룩한 침묵이 느껴졌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문제는 일순간 해결된 듯 하였고, 모든 이들은
성인의 유해 옆에 서 있다는 은총의 충만함을 경험하였다.

주교 시노드의 다음 회의에서, 안토니 대주교는 자신과, 시라큐스와 성삼위일체 수도원의
라우르스 대주교, 시애틀의 끼릴 주교와 관구의 주교들에 의해 추천된 12명의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성 요한의 영예로운 유해를 조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성 요한의 유해를 조사한 위원회
의 보고를 듣고, 주교 시노드는 성인이 안식한 6월 19일(구달력)에 있을 성 요한의 시성식을
준비하도록 축복하였다.

오늘날처럼 하느님을 거역하는 무서운 시대에, 주님은 그의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위대한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성 요한은 하느님의 권좌 앞에서 용기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수호자로서 싸운 투사이자, 엄격한 수행을 하며 때로는 자신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로
간주한 금욕주의자의 전통을 따랐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가 된 성 요한은 이 세상의 지혜를
초월하여, 양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선하고 좋은 목자로서, 젊은 정교회 신도의
스승이자 보호자로서, 기적의 수행자이자 돈을 바라지 않는 의사로서, 사도이자 선교사로서,
깊이 있는 신학자로서, 신비로운 성사의 수호자로서, 막중한 책임을 진 주교로서, 자신이 하느님
과 사람들 앞에서 약속한 것을 흔들림 없이 지켰다. 성 요한은 자신이 주교로 선출될 때, "한 사람
이 자신의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일 중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영원한 삶에 적합하도록 준비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성 요한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 구원의 참된 길을 걷는 여정에서 우리를 보살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의 모든 성인
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시는 우리 하느님께 영광과 영예, 경배가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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