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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러시아정교회는 쌍크트 뻬쩨르부르그에 있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가 한국에 관한 정교회 선교 계획을 니콜라이 Ⅱ세 황제로부터 1897년에 인준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선교사로 내정된 사람은 수사사제 암브로시 신부, 수사부제 니콜라이 신부 그리고 독서직 크라신 등 세 사람이었습니다. 선교단은 1897년 안에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한국 땅에서는 열강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에 러시아인의 입국이 쉽지 않았습니다.
선교단은 노보 키예프라는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부대 안에서 임시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수사사제 암브로시 신부는 부대 안 장병들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하였습니다. 타락한 군대는 크리스챤 정신으로 무장하여야 승리할 수 있다고 강론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군인들의 무고로 한국땅 선교의 길에서 도중 하차하여 쌍크트 뻬쩨르부르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독서직 크라신은 황야와 같은 군부대에서 2년 가까이 버티다가 견딜 수 없어서 선교사 일을 포기해버렸습니다.
홀로 남은 수사부제 니콜라이 신부는 끈기 있게 기다리다가 한국 정부(대한제국)의 입국 허가를 받고 멀고도 험한 한국 선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1897년). 니콜라이 신부는 제2차 선교단의 충원을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로 사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는 제2차로 선교단을 구성하였는데 수사사제 흐리산프 쉐트코프스키 신부와 독서직 요나 레브쉔코를 한국선교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들은 1900년 초에 입국하여 같은 해 3월 2일 대순교자 훼오도라 띠로나 축일에 서울 정동 러시아 공사관 구내에서 리뚜르기아를 봉헌했습니다. 그날 집전된 거룩한 성찬예배에는 주한 러시아인들 특히 제물포에 주둔하던 러시아 해군 합창단이 참석하여 모두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 신문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성당의 명칭은 니콜라이 Ⅱ세 황제의 적극적인 원조로 한국 땅에 선교가 시작되었고 또 앞으로도 큰 후원이 계속될 것을 기대하면서 황제의 이름과 같은 성 니콜라스의 전구 도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 하였습니다.
흐리산프 신부는 한국 러시아정교회 성당 신축지로 주한 러시아 공사관 근처의 땅을 물색하였습니다. 마뜌니나(N. G. Matyunina)공사의 중재로 땅(현재 경향신문사 자리, 서울 정동 22번지)을 매입했습니다. 추가로 구입한 땅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하사하였다하여 러시아의 니콜라이 Ⅱ세 황제는 고종 황제에게 전문을 보내어(1898. 1. 23.) 감사의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한·러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자 러시아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이 어렵게 되면서 니콜라이 Ⅱ세 황제는 공짜 땅을 거부했고 땅의 대금을 모두 환불했습니다($12,000-멕시코 달러, 1898.4.11).
1902년 러시아정교회 새 성당이 정동에 들어서면서 아라사 성당이라 하여 많은 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듬해(1903년)에는 러시아제 종(鍾) 5개가 수입되었는데 아라사 성당의 종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연주를 하듯 울려 퍼졌습니다.
1904∼1905년 러·일전쟁으로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후 6일만에 주한 러시아인 선교사들은 모두 철수하였습니다.
1906년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파벨 이바노프스키 신부를 책임자로 하여 한국 땅에서 러시아정교회 선교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파벨 신부의 조력자 이반 강한탁은 러시아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전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묘비 건립을 니콜라이 Ⅱ세 황제의 승인하에 한국 러시아정교회가 추진하려 했지만 일본 당국의 방해로 무산되었습니다.
한국 러시아정교회 관할 교구는 본래 쌍크트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였는데 1912년에 블라디보스톡 교구로 옮겼습니다. 한국인 사제의 필요성을 느낀 교구는 이반 강한탁을 부제로 서품했고 같은 해에 사제로 승품했습니다. 이반 강한탁 신부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러시아정교회의 사제가 된 것입니다.
1917년, 불행하게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정교회는 박해의 광풍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키예프의 수좌대주교 블라디미르가 살해되면서 러시아 땅에서 박해의 피는 마를 사이가 없었습니다.
1918년 한국 최초의 선교단장 암브로시 신부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순교하였고 니콜라이 Ⅱ세 황제는 예카테린부르그에서 시해되었으며 그 가족과 친척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같은 해 러시아 국적의 한국인 사제 이반 강한탁 신부는 한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환하여, 러시아 국적의 한국인 루가 김희춘 부제 신부는 홀로 한국 러시아 정교회에 남았습니다. 김희춘 신부는 몇 명의 러시아인 사제들이 전출, 전입되는 과정에서 묵묵히 성직을 수행하는 중에 1922년 2월 26일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슬프게도 일본 정교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1923년 뻬쩨르부르그의 수좌대주교 베냐민이 살해 유기되면서 수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뒤이어 순교를 당했습니다.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후원금이 끊어지면서 동시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교회의 명맥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924년 루가 김희춘 신부는 사제로 승품되어 교회를 지켰습니다. 후일 정교회 원로였던(1980년대) 고 김 파벨 옹의 증언으로는 루가 김희춘 신부는 순교자적 자세로 교회를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영양실조로 쓰러져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여 한국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됨으로써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교구소속이 없어지는 고아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일했던 방인 사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는 재정적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도 성무를 집행했고 흩어진 양의 무리들을 찾아 정교 신앙을 독려한 참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50년 6월 25일, 북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에게 강제로 납치되어 가신 이후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1956년까지 성직자 없이 유지되던 한국 러시아정교회의 신도 공동체는 그리스정교회 관할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한국 땅에서의 러시아정교회 선교 사업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러시아정교회, 성 니콜라스 정교회 성당(서울 정동 22번지. 현 경향신문사 자리)에 관한 재산권 시비가 있었고 한국의 그리스정교회 공동체(한국정교회라 호칭되고 있습니다.)는 정동에 있던 한국·러시아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을 매각하고 마포구 아현동 424-1번지에 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세워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한국·러시아정교회 선교 사업은 하느님의 섭리로 새로운 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1994년 봄, 부활절에 러시아정교회 시노드(해외, 총수 미트로뽈릿 비탈리)는 유스틴 강태용 에게 한국 러시아정교회 책임 신부로 <우카즈>를 수여하였고 한국 러시아정교회를 주관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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